이승용 위해한국인(상)회 회장이 웨이하이 사무실에서 한중 양국 국기가 놓인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회장은 웨이하이 한인사회와 한국기업 지원 활동, 한중 경제교류 확대를 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국 산둥성(山东省)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도시 웨이하이(威海). 지도상으로 보면 한반도를 향해 길게 돌출된 산둥반도의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맑은 바다와 깨끗한 도시 환경으로 중국 내에서도 유명한 도시지만, 한국인들에게 웨이하이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중국 진출 역사의 상징과 같은 도시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남짓, 카페리로는 하룻밤이면 닿는 거리. 이 가까운 도시를 통해 수많은 한국 기업인과 교민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의류봉제 공장을 세우고, 무역회사를 만들고, 식당을 열고, 공장을 운영했다.
지금은 중국 경제의 성장과 산업구조 변화 속에 예전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웨이하이는 여전히 한국과 가장 밀접한 중국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웨이하이 교민사회의 흥망성쇠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승용 웨이하이 한인상공인회 회장이다. 1990년대 말 웨이하이에 진출해 20여 년 넘게 사업과 교민사회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웨이하이 한인사회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인터뷰 내내 “웨이하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시대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중국은 정말 기회의 땅이라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한국에서는 IMF 이전까지 제조업 인건비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고, 중국은 인건비가 저렴하면서도 노동력이 풍부했습니다. 특히 웨이하이는 한국과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기업인들에게 심리적 부담도 적었습니다.”
웨이하이와 한국의 인연은 사실 한중수교 이전부터 시작됐다.
중국 산둥항구그룹(山东港口集团) 위해항(威海港) 전경. 한국과 가장 가까운 중국 항구 가운데 하나인 위해항은 인천·평택 등 한국 주요 항만과 연결되는 한중 물류·여객 교류의 핵심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1990년 인천~웨이하이 카페리 항로가 개설되면서 끊겼던 한중 뱃길이 41년 만에 다시 열렸다. 당시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공식 수교 이전이었지만, 웨이하이는 사실상 한중 민간교류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카페리를 타고 웨이하이로 들어오던 사람들은 대부분 무역상이나 사업가들이었습니다. 큰 가방을 들고 샘플 제품을 가져와 중국 공장을 찾아다녔죠.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고 정보도 부족했기 때문에 직접 와서 부딪히며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회장은 웨이하이 초기 한인사회를 “개척자 공동체”라고 표현했다.
“초기에는 모두가 서로 도우며 살았습니다. 어디에 공장 자리가 있는지, 통역은 누가 가능한지, 원단은 어디서 구하는지 정보를 나눴습니다. 교민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거의 다 알고 지냈습니다.”
당시 가장 먼저 진출한 업종은 의류봉제와 신발, 가방 같은 노동집약형 제조업이었다. 이후 전자부품 조립업체와 무역업체들도 빠르게 늘어났다.
웨이하이 곳곳에는 한국 공장이 들어섰고, 자연스럽게 한국 식당과 슈퍼마켓, 여행사, 병원, 학원도 생겨났다. 한국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와 교회도 만들어졌다.
이 회장은 “당시 웨이하이 시내에 가면 한국 간판이 너무 많아 여기가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며 웃었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 웨이하이는 중국 내 대표적인 한국인 밀집 도시로 성장했다. 한국인 수는 수만 명에 달했고, 한국 투자기업도 급격히 늘었다. 웨이하이 시정부 역시 한국 기업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웨이하이 정부는 한국 기업이 들어오면 공장 부지와 행정 지원을 적극적으로 제공했습니다. 공무원들도 한국 기업 유치를 중요한 정책으로 생각했죠. 당시에는 한국 기업이 들어오면 지역경제가 살아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중국 웨이하이(威海) 시내의 대표적인 한인 밀집 상권인 ‘한러팡(韩乐坊)’ 야경. 한러팡은 한국 음식점과 카페, 쇼핑시설 등이 밀집한 곳으로, 한때 수많은 한국 교민과 관광객들이 찾으며 웨이하이 한인사회의 상징적인 거리로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인건비와 임대료가 크게 올랐고, 중국 기업들의 기술력과 생산 경쟁력도 높아졌다. 과거처럼 단순히 ‘싼 인건비’를 보고 중국에 오는 시대는 끝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 근로자 임금도 많이 올랐고 환경규제나 세금 문제도 강화됐습니다. 단순 제조업은 자연스럽게 경쟁력이 약해졌죠.”
여기에 2016년 이후 사드(THAAD) 사태가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한중 관계 악화 속에 한국 기업들은 어려움을 겪었고, 일부 업종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어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웨이하이 교민사회도 큰 충격을 받았다.
“코로나 시기에는 왕래 자체가 막혀버렸습니다. 중국에 들어오기도 어렵고 한국에 나가기도 어려웠습니다. 사업뿐 아니라 교민사회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일부 제조업체들은 동남아시아로 생산기지를 이전했고, 교민 수 역시 감소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웨이하이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과거처럼 단순 제조 중심은 줄었지만 지금은 무역, 물류, 전자상거래, 식품유통, 플랫폼 비즈니스 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형태가 달라졌을 뿐 한중 교류의 중요성은 여전합니다.”
현재 웨이하이에는 약 900개의 한국 투자기업과 1만 명 안팎의 교민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웨이하이는 한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해상물류와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웨이하이(威海) 해안공원에 설치된 대형 조형물 ‘웨이하이의 창(威海之窗)’. 바다를 배경으로 액자 형태를 들고 있는 두 손 조형물이 특징으로, 한국과 가장 가까운 중국 도시인 웨이하이의 개방성과 국제교류 이미지를 상징하는 대표 포토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은 현재 의류 생산 및 무역업과 한국식품 유통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1999년 처음 웨이하이에 와 의류무역을 시작했고, 2003년에는 자체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에는 OEM 생산이 중심이었지만 앞으로는 자체 브랜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단순 하청 생산만으로는 경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한국과 중국 시장을 동시에 겨냥한 브랜드 사업이 필요합니다.”
웨이하이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역시 ‘가까움’을 꼽았다.
“웨이하이는 심리적으로도 한국과 가깝습니다. 배 타고 오면 바로 닿는 거리니까요.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출장이나 물류 이동이 매우 편리합니다.”
그는 또 웨이하이 시민들과 지방정부의 우호적인 분위기도 장점으로 들었다.
“웨이하이 현지인들은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친절한 편입니다. 시정부 역시 한국 기업과 교민사회에 관심이 많고 지원하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현재 웨이하이 한국인상공회는 한국 기업과 교민들의 권익 보호와 경제 네트워크 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웨이하이 시정부와 한국 공공기관, 경제단체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투자설명회와 경제간담회, 학생 지원사업, 교민 봉사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이 회장은 앞으로 웨이하이 한인사회가 과거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과 한국은 경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웨이하이는 물류와 관광,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그는 한국 청년들에게 중국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중국을 너무 멀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와보면 기회가 많습니다. 산둥대(山东大学)와 하얼빈공대(哈尔滨工业大学) 같은 좋은 대학도 있고 중국 시장을 이해할 수 있는 장점도 큽니다. 앞으로는 한국과 중국을 동시에 이해하는 인재가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이렇게 덧붙였다.
“웨이하이 한인사회는 단순히 돈 벌러 온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가 아닙니다. 낯선 중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교민들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는 분들이 많으며, 그 중심에 웨이하이 한인상공인회가 있씁니다. 한국 사회가 그런 교민사회의 노력과 의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