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나고, 뜨거웠던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계절이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는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스치는 바람에는 분명 가을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창문을 열면 조금은 서늘해진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책장에 오래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꺼내 펼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날에는 ‘개권유익(開卷有益)’과 ‘개권일락(開卷一樂)’이라는 말이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책을 펼치면 반드시 유익함이 있고, 책을 읽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 된다는 뜻이다. 한 권의 책, 한 줄의 문장이 때로는 삶의 방향을 다시 일깨워 주고, 복잡했던 마음에 맑은 길을 열어 준다.
오늘, 가을이 오는 고요한 길목에서 오래된 가르침 하나를 음미해 본다. 바로 담박명지(澹泊明志)와 영정치원(寧靜致遠)이다.
담박명지란 욕심을 덜어내고 담담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자신의 뜻이 밝아진다는 의미다. 영정치원은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야 멀리 내다볼 수 있으며, 더 큰 이상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제갈량이 아들 제갈첨에게 남긴 「계자서(誡子書)」의 구절,“비담박무이명지(非澹泊無以明志), 비영정무이치원(非寧靜無以致遠)”에서 비롯된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성취, 더 빠른 결과, 더 큰 인정과 박수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도를 요구한다.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말하고, 더 많이 가져야 성공한다고 말하며, 잠시 멈추는 사람을 뒤처진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의 길은 언제나 빠르게 달리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때로는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욕심이 마음을 가득 채우면 정작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다. 눈앞의 이익에 마음이 흔들리고, 남과의 비교에 지쳐 자신의 길을 잃기 쉽다.
욕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마음이 맑아진다. 마음이 맑아지면 사물의 본질이 보이고, 사람의 진심이 보이며, 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의 모습도 드러난다. 담박함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꼭 지켜야 할 가치와 뜻을 선명하게 붙드는 힘이다.
고요함도 마찬가지다. 고요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멈춤이 아니다. 깊은 고요 속에는 삶을 이끌어 갈 단단한 에너지가 숨어 있다. 물이 맑아지려면 흔들림이 가라앉아야 하듯, 마음도 잠시 고요해져야 먼 길을 바라볼 수 있다. 조급함에 사로잡힌 마음은 가까운 것만 보지만, 평온한 마음은 더 먼 미래를 바라본다.
그래서 영정치원이라 했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먼 곳에 이를 수 있고, 고요함을 얻어야 원대한 뜻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큰 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린다고 해서 반드시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걸음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일이다. 조급하지 않은 발걸음,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리고 끝까지 지켜 가는 뜻이 결국 사람을 먼 곳으로 이끈다.
입추의 바람은 우리에게 그러한 삶의 리듬을 가르쳐 준다. 폭염의 열기를 조금씩 거두어 가고, 성급했던 마음을 잠시 식혀 준다. 들판의 곡식은 서두르지 않고 익어 가며, 나무의 잎은 제때가 되면 스스로 빛깔을 바꾼다. 자연은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계절을 충실히 살아낸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남의 속도에 맞추어 자신을 다그치기보다, 내 마음의 계절을 살피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오늘의 작은 평온이 내일의 큰 이상을 이루는 씨앗이 된다. 오늘 읽은 한 페이지의 책, 오늘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오늘 잠시 비운 욕심 하나가 결국 더 넓고 깊은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선선한 입추의 가을바람이 긴 여름 열기의 땀방울을 식혀 가는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문 앞에 서 있다. 마음속 소란을 잠시 내려놓고, 책을 펼치고 옛 선인들에게 삶의 지혜를 구하며, 맑은 뜻을 세우고 고요한 마음으로 인생의 여정인 먼 길을 바라보자.
욕심 없는 맑음으로 뜻을 밝히고,
고요한 마음으로 길을 넓혀 가는 것.
그것이 가을이 오는 고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새롭게 품어야 할 희망일 것이다.

[권세준 교수]
(프로필)
문학박사
동국대 법무대학원 (디지털자산 법무전공) 책임교수
한국디지털자산학회 회장
사단법인 4월회 사무총장
예천문화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