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스치는 빗줄기가 파전 부치는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를 적신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빗방울 사이로 뿜어내며 하염없이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는 추억을 씻어내리는가, 아니면 새로운 상처를 드러내는가. 푸른 정원수 잎새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부서질 때마다 마음 한구석의 우수가 울렁인다.
비가 오니 참 좋다.
이 말은 어느새 나에게 던지는 위로가 되어버렸다.
요즘은 만나지 않지만, 퇴직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알게 된 동생이 문득 생각났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어린 새처럼 조심스럽던 그가, 마음에 들고 예쁘다고 가끔씩 무례한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척, 참고 배려했더니 어느새 인가 나의 빈틈을 헤집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럴 땐 "장자"의 우화를 꺼내 놓아야 한다. 작은 우물 속에서 하늘을 논하던 개구리는 끝내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거북이가 말하는 광활한 바다를 조롱하며 "내 우물이 천하의 전부다"라고 우겼다.
내가 좀 더 친해지려고 베풀었던 작은 친절이 오히려 자신에 대한 우월감으로 여기는지, 언제부턴가 내 삶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그릇이 차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나 정작 그의 우물은 깊지도 넓지도 않고, 단지 물이 고여 있을 뿐이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선현의 말씀처럼, 고인 물은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해 탁해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우물 안에 갇혀 타인의 경계를 넘보는 이는, 결국 썩은 물처럼 주변을 오염시킨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불치하문(不恥下問)이란 말은 바로 이를 경계한 말일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진정한 배움이 시작되는 법인데, 이를 상대의 무지로 오해하여 자신의 작은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려 드는 이들이 정말 많다.
행여 오늘 밤새 내린 빗물에 장자의 우물에 차오르면 수면은 높아질 지언정, 여전히 하늘은 구멍 속에 갇혀있을 것이다.
인간의 아집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물의 벽을 더욱 단단히 쌓을 뿐 달라지는게 없다.
담배를 끄면서 내뿜은 연기가 빗방울 사이로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빗방울이 부서지듯 마음속 경계가 허물어지길 바라본다. 비록 그 동생과의 인연이 개선되지 못하고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라도,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진정한 성찰은 타인의 우물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우물의 깊이를 재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빗소리가 조금 잦아드는 듯하다. 어쩌면 그 동생도, 아니 우리 모두가 오늘 비처럼 살면서 쌓아 놓은 마음의 경계를 조금씩 녹여 버렸으면 좋겠다.
<황문섭 기자>